‘런던에 편도 항공권을 끊고 왔어요’
이 말 한마디가 중국음식에 고개를 쳐박고 있던 나를 그녀에게로 향하게 만들었다. 단 한번도, 전혀 계획 없이, ‘그냥’ 편도 항공권을 끊고 온 한국인 여자는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도전적으로 보였고 너무나 창의적인 여자로 보였다. 그 말 한 마디에 사람이 달라 보였다. 물론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녀는 정말 아무런 계획도 없이 편도로 런던에 온 것 이였다. 어쨋든 그 말 한 마디에 그녀의 눈빛을 억지로 피하며 밥을 먹는데 집중하고 있던 난 고개를 들었고, 2018년 1월 어느 날, 그렇게 모든게 바뀌었다.
2018년 3월 22일. 난 여전히 영국에 있었다. 아니 난 혜아와 여전히 영국에 있었다.
우린 각자의 ‘남자친구’와 ‘여자친구’가 되었고, 길지 않은 2 개월의 기간 동안 둘이서 꽁냥꽁냥 거리느라 밴은 진척된게 많지 않았지만 밴의 인테리어 계획도 바뀌었다. 더블베드를 넣기로 했고 샤워실도 만들기로 했으며 부엌도 완벽하게 만들기로 했다.덕분에 영국을 떠나는 날짜도 바뀌었다.
우린 최대한 밴을 개조하는데 모든 시간을 쏟아 붓기 위해 이 날 같이 민박집 일을 그만 두었다. 그리고 바로 IKEA에서 소파와 더블침대 겸용으로 쓸 수 있는 ‘Day Bed’와 매트리스 그리고 침구류 등을 먼저 샀다. 그렇게 신문사 사무실 뒷편 주차장에서 침대만 만들어 놓은 채 밴라이프가 시작됐다.
여전히 개조하는데 돈이 들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신문사 아르바이트는 계속 하고 있었다. 650파운드(약 100만원) 남짓의 월급 중에 20~30% 정도는 밴을 개조하는 재료비에 들어갔으며 나머지는 앞으로의 여행을 위해 최대한 아껴두기로 했다. 그래서 우리는 식비를 아끼기 위해 근처 마트에서 샌드위치로 아침을 해결했고 점심은 건너 뛰고 저녁을 사무실에 있는 전자레인지에 데워 먹을 수 있는 인스턴트 음식을 사서 떼웠다. 한 달 반 동안 메뉴는 거의 변하지 않았다. 아마 우린 평생 먹을 샌드위치와 인스턴트 음식을 다 먹었을거다.
그렇게 아무것도 없는 밴 안에서 음식은 근처 마트에서 해결하고 잠은 차에서 잤으며 생리현상은 사무실 건물 화장실에서 해결했지만 샤워를 할 곳이 없었다. 우리나라 처럼 찜질방이나 사우나가 있는 것도 아니였고 심지어 모텔도 없으니 씻을 곳이 마땅찮았다. 밴을 개조하기 몇 달 전, 사무실에서 일하면서 다니던 구립 체육관이 근처에 있어서 이 곳에서 운동도 하고 샤워도 했지만 한 달 회비가 25파운드(약 4만원)였다. 우리에게 25파운드는 거의 일주일 치 식비에 해당하는 엄청나게 큰 돈이였고 심지어 두 명이면 50파운드였으니 우린 감히 체육관에 등록할 수 엄두를 낼 수 없었다.
다행히 4월의 날씨도 여전히 추워서 개조작업을 해도 땀이 잘 나지 않은 이유도 있지만, 나 뿐만 아니라 혜아도 씻는 문제에 대해서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아서 일주일 넘게 샤워를 하지 않고 지낼 수 있었다. 하지만 밴라이프를 시작한지 2주일 정도가 되어가자 더이상 씻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는 지경이 되었다.
구립 체육관은 사람이 거의 없었다. 주말에 축구 경기가 있는 날을 제외하면 관리하는 사람 한 두명 뿐이었다. 우린 갈아 입을 속옷과 세면도구들을 챙기고 체육관으로 갔다. 회원카드를 보여주면 리셉션에서 출근등록을 해주고 그 카드로 헬스장을 들어갈 수 있다. 체육관에 도착한 우리는 약간은 긴장 되었지만 아주 뻔뻔한 얼굴로 체육관 문을 열고 들어가 당당하게 리셉션 앞 직원을 지나쳤다. 여유롭게 샤워를 마치고 다시 직원의 눈을 절대 마주치지 않은 채 체육관을 나왔다. 당연히 우린 회원카드가 없었다.
샤워실은 회원카드가 없어도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이었고, 너무나 아무렇지 않게 들어가는 우리를 당연히 회원일거라고 생각한 직원 덕분에 우린 샤워를 할 수 있었다. 날씨는 여전히 쌀쌀했지만 그 때의 개운함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체육관 직원이 아주 친절하게 회원이 아니면 사용할 수 없다고 말하기 전까지 거의 한 달 동안 일주일에 한 번씩 체육관에서 공짜로 샤워를 즐겼다.
완성되기 전 까지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난 혜아에게 너무나 놀랐다. 더딘 개조 때문에 출발 날짜가 늦어지면 당연히 짜증을 낼 줄 알았고, 돈이 떨어지면 돈 벌어오라고 닥달할 줄 알았으며 샤워를 못해서 밤새도록 울거라고 생각했다.
오히려 침대 하나 덜렁 있는 밴에서 침대가 있다며 나보다 더 즐거워 했고 씻지도 못해서 안절부절하는 나를 진정시켰으며 돈이 모자라서 샌드위치도 하나 밖에 사질 못했는데도 오히려 샌드위치 하나를 먹을 수 있다며 고마워했다. 혜아는 내가 보고 듣고 겪었던 모든 ‘여자’의 모습과 달랐다. 더딘 개조와 계속되는 실수 그리고 샤워를 하지 못해서 짜증과 히스테리를 부리는건 나였다.
어쨋든 우여곡절 끝에 밴은 4월 말에 완성되었고 우린 주차장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