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초등학교를 들어가기도 전인 80년대 초반, 아빠는 중동건설 붐을 타고 리비아로 외화를 벌러 갔다. 지금처럼 국제선 비행기가 흔하지도 않았고 심지어 해외여행을 가는 것도 쉽지 않았기 때문인지 아빠는 일년에 한번만 집에 왔다. 때문에 엄마는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나와 내 동생을 키우느라 독박육아를 해야만 했고 우린 아빠 없는 아이로 초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비만 오면 온통 진흙 바닥이 되서 걸어다니기도 힘든 가난한 동네였던 강남구 개포동에서 살던 우리는 아빠 덕분에 살림살이가 조금씩 나아졌고 연탄을 떼서 난방을 하던 낡은 개포동 시영 아파트를 떠나 다리가 후들거리는 14층 아파트가 즐비한 신도시로 이사를 갈 수 있었다. 나와 내 동생은 부족함 없이 자랐고 거짓말 조금 보태서 돈 걱정은 하지 않으면서 살았다.
물론 누구 한 사람만 잘해서 그렇게 된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어쨋든 토끼 같은 자식들을 뒤로 하고 사막 한복판에서 젊은 시절을 불싸지르며 돈을 번 아빠의 덕이 제일 크다고 생각한다. 무뚝뚝하고 자기만 아는 아빠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는 엄마에게 맞장구를 치며 우리 결혼하면 엄마의 인생을 찾아가라고 농담 반 진담 반인 답을 했지만 우리는 아빠 덕분에 우리가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이가 든 지금 생각해보니 아빠는 돈을 얻은 대신에 가족을 잃었다. 한창 아름다운 신혼시절을 떨어져서 보낸 아빠는 우리가 다 크고 나서 노후를 오붓하게 보내려 했지만 엄마는 돌아가셨고 유년시절을 아빠 없이 보낸 우리는 지금도 아빠와 서먹하다. 어린 시절 고민을 얘기하고 사소한 일들을 신나게 떠들어 대야 할 아빠가 집에 없었기에 지금도 아빠와 대화를 하는 방법을 잘 알지 못한다.
사실 아빠는 자신이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어 가족이 풍요롭게 살게 되면 모든게 다 해결될거라는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의 내가 확실히 알 수 있는건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 순간을 놓치면 그 무엇도 그 순간을 보상해주지 않는다. 그걸로 끝이다. 그래서 난 밴라이프를 했었고 혜아와 사랑이를 만났으며 놓칠 수 없는 순간들을 함께 했다.
우리의 가장 큰 수입원이 되었던 택배 일을 그만 두는 오늘도 내 인생에서 절대 놓쳐서는 안되는 것들을 위한 순간이라 굳게 믿는다.
Life is N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