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여곡절 끝에 파리에 입성했다. 도착하던 날 날씨는 화창했고 거리 곳곳은 사람들로 넘쳐났다. 막 밴을 몰고 파리의 외곽에 들어왔을 뿐인데 기분은 이미 파리 한복판에 있는 듯 신이 났다. 얼마 전 알게 된 캠핑앱을 이용해서 파리 북부 외곽 지역에 적당한 정박지를 찾아 주차를 했다. 큰 레스토랑의 주차장이라 조금은 복잡해 보였지만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듯 했고, 이미 우리보다 훨씬 덩치가 큰 캠핑카 몇 대가 주차되어 있어서 마음이 조금은 놓였다.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이동한 탓에 전날 먹고 남은 닭백숙에 밥을 말아 허기를 채우고 서로 나름 멋지다고 생각하는 옷을 챙겨 입은 뒤에 에펠탑을 향해 신나게 걸었다.

걷고 보니 밴을 주차한 곳은 파리 중심가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한 시간 정도를 걸어 큰 공원을 가로질러 파리 특유의 건물들이 즐비한 주택가를 지나니 저멀리 에펠탑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에펠탑에 가까워질수록 사람들과 차들은 많아지기 시작했고 도로는 온통 공사중이라 정신이 없었다. 혹시나 모를 테러에 대비한다고 에펠탑 주위는 흉측한 가벽이 세워져 있었고 사람들은 몇 군데의 출입구를 통해서 검색을 받고 나서야 근처에 갈 수 있었다.
겨우 에펠탑도 보고 공원도 걸었지만 하도 오래 걸어서 온터라 더는 돌아다닐 힘이 남아있지 않았고 이미 둘 다 오랜만에 사람이 많은 도시에 와서 그런지 정신이 나가버린 상태여서 어두워지기 전에 밴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돌아가는 길에 간단히 장을 보기로 했지만 가는 내내 큰 마트를 찾지 못했고 해는 떠있었지만 시간은 거의 9시가 다되어 있어서 문을 닫은 뒤였다.

밴으로 돌아가면 먹을 것도 있고 화장실도 있으니 조금만 참고 열심히 걷자고 그와중에 아름다운 도시의 노을을 배경으로 위로하며 주차장을 향해 걸었지만 갈수록 처음에 걸어갔던 길과는 다른 곳으로 가는 듯 했다. 우리는 이미 영국에서 사 온 심카드의 데이터가 다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구글맵으로 검색을 할 수도 없었다. 이미 오래 전부터 화장실을 참고 있었던 혜아는 매우 짧은 시간 이내에 화장실을 갈 수 없다는 사실에 정신이 아득해졌고 나 또한 핸드폰이 무용지물이라는 사실에 당황했다. 파리는 거리 곳곳에 무료 공중화장실 시설이 잘되어 있었고 길을 찾아 헤매다가 우연히 발견해 다행히도 모든 끈을 놓기 직전에 혜아는 화장실을 갈 수 있었다. 마침 그곳에 무료 와이파이가 잡혀 밴이 세워져 있는 곳을 구글맵으로 찾아냈다.
파란만장한 하루를 보내고 왠지모르게 시끌벅적한 아침에 눈을 떴다. 밴의 천장 창문을 통해 빼꼼히 밖을 보니 주차장을 통제하고 있었다. 조용히 아침을 먹고 밖을 서성이고 있으니 레스토랑 직원쯤으로 보이는 사람이 다가와 행사가 있어서 주차장을 떠나야 한다고 어설픈 명령조의 영어로 말해주었다.
유럽을 밴으로 여행하면서 느낀거지만 비영어권의 나라에 가면 상당히 불쾌하게 말을 하는 경우들이 많다. 영국의 영어가 심하게 친절하고 존대하는 경향이 있긴하지만 프랑스나 동유럽권 나라들은 ‘지금 나에게 지시를 하는건가’ 싶을 정도로 버릇없게 말한다. 처음에는 상당히 기분이 나빴지만 이들도 영어에 익숙하지 않으니 그럴 수 밖에 없겠구나 하고 생각을 하고나니 나중에는 그러려니 하게 되었다.
어찌되었든 밴의 내부를 이동 가능한 상태로 정리를 한 뒤 새로운 정박지를 찾아 출발했다. 이번엔 좀 더 파리 중심지에 가까운 곳에 머물 생각이였다. 좀 더 과감하고 그 누구도 지낼 수 없을 것 같은 곳까지 가기로 했다. 앞바퀴에서 이제는 브레이크를 밟지 않아도 쇳소리가 나고 있었지만 여전히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샹젤리제를 향해서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캠핑앱의 리뷰에는 절대 견인되지도 않으며 경찰이 지나가도 아무런 제재를 하지 않는다고 쓰여져 있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세느강이 옆에 흐르고 세계 최고 쇼핑거리 중 하나인 샹젤리제 거리에서 머물게 되는 것이었다. 실제로 도착한 곳은 예상보다 훨씬 좋았다. 그랑빨레(Grand Palais) 옆 쁘띠빨레(Petit Palais) 뒤쪽의 주차장이였고 주차장 바로 옆 구획이 나뉘어지지 않은 곳이었기 때문에 주차를 해도 경찰이나 단속반이 뭐라고 할 수 없는 장소였다. 정말 완벽한 헛점을 가진 곳이었다.
사방으로 푸른 공원들이 펼쳐져 있었고, 얼마 멀지 않은 곳엔 무료 식수를 받을 수 있는 개수대 그리고 무료 화장실까지 있었으니 우린 이곳에 아무런 걱정 없이 머물고 싶은 만큼 머물 수 있었다.
이제 여름으로 접어들어 한낮의 온도가 점점 올라가고 있었지만 큰 나무 밑에 주차를 해두어서 아침 저녁으로 밴의 내부는 서늘해졌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정말 많았지만 우리는 이미 창문과 문을 활짝 열고 지내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을 정도로 생활에 익숙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