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취향이 확고한 난(물론 혜아보단 덜하지만) 내가 인정하고 좋아하는 뮤지션의 음악만 듣는다. 그리고 들어본 적 없는 멜로디와 창의성이 느껴지고 개성이 넘치는 음악을 좋아한다. 우연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서 주로 영국 뮤지션들의 음악을 듣게 되는데 미술을 전공한 난 음악의 뮤직비디오도 음악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여겼다.
학창시절 ‘지구촌 영상음악’ 이라는 주말 티비 프로그램과 거기에서 발매하는 잡지, 그리고 가끔 사은품으로 끼워주는 뮤직비디오까지 빠짐없이 챙겨보던 난 21세기 유튜브의 덕을 톡톡히 보며 영국 뮤지션들의 음악과 뮤직비디오를 즐겼다. 듣고 또 듣고 보고 또 봤다고 하는게 맞을 것 같다.
오늘 문득 내가 요 몇 년간 들었던 음악들로 혜아와 내가 처음으로 만나던 때 부터 지금까지의 역사를 기록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제대로 기록하려면 수십곡을 이곳에 나열해야하지만 일단은 가장 대표적인 음악들만 이 글을 읽고 있는 분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런던 민박집에서 일을 하며 밴을 개조하고 있던 2019년 1월, 혜아를 처음 만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좋아하게 되었을 때 알게 된 음악이다. 손님들이 민박집의 주제곡으로 착각할 정도로 지겹게 틀어놨었다. 그 당시 이 음악의 가사가 정말 많은걸 생각하게 하고 고뇌하게 만들었었다.
혜아와 밴을 개조해 같이 미래를 알 수 없는 여행을 떠나기로 한 뒤, 혜아가 민박집에서 설겆이를 하며 듣다가 반하게 되었다는 음악. 밴라이프 초반 이 사람의 음악들을 정말 열심히 들었다. 이 음악을 듣고 있노라면 브레이크가 고장나 이주일이 넘는 시간 동안 꼼짝없이 정박해 있었던 파리 외곽의 어느 DIY숍 매장 주차장이 떠오른다.
참고로 혜아가 한국에 잠시 갔다가 크로아티아로 돌아왔을 때를 기록한 영상에 흘러나온 음악도 이 사람의 것이다. 꼭 이 사람의 음악을 우리 영상의 배경음악으로 쓰고 싶었다.
쉥갠 기간도 피하고 돈도 벌겸 일하며 지냈던 크로아티아의 민박집에 있을 때 발표된 음악. 딱히 손님도 많지 않고 그리 재미있는 일도 있지 않았던 그 당시 손님들에게 아침 식사를 주던 때에 틀어 놨던 음악이다. 그리 크게 관심이 있진 않았지만 매일 아침마다 틀어놔서인지 이 음악을 들으면 그 때가 떠오른다.
우리가 크로아티아에서 민박집을 하고 있었을 때, 돈을 많이 벌진 않았지만 부족하지 않게 지내고 있었다. 방이 세 개나 딸린 집에 살며 매일 맛있는 음식도 해먹고 바로 앞 바닷가로 산책을 나가며 아무런 걱정 없이 행복에겨운 투정을 부리며 지내던 시절 들었던 음악이다. 술에 살짝 취한 어느 날 티비에 이 뮤직 비디오를 틀어놓고 혜아 앞에서 어설프게 춤을 따라 췄고 혜아는 그 모습이 귀여웠었나보다. (사실 내가 술에 조금만 취해도 화를 낸다) 요즘도 이 음악을 들으면 그 때 얘기를 한다.
한국에 돌아온 지금, 마음에 여유가 없는 것인지 코로나 때문에 뮤지션들이 새로운 음악을 발표하지 않아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을 기억할 만한 음악이 없다. 혜아와 같이 음악을 듣지 않아서 일까. 아니면 나의 감정이 매마른 것일까.
이럴 땐 내가 혜아에게 이상한 감정을 막 느끼기 시작하던 런던의 겨울 어느 날 차 안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음악을 들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