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소위 말해 풀타임 밴라이퍼다. 주말이나 휴가 때에만 즐기는 밴라이프가 아니라 먹고 씻고 자는 일을 모두 밴 안에서 해결 해야하는, 24시간 365일을 밴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풀타임 밴라이퍼 생활을 하면서 제일 귀찮을 때가 있으니 바로 식재료를 사러 갈 때이다.
보통 국도로 이동을 하는 편이고 국도 중간중간에는 항상 큰 마트가 있기에 우린 지나가면서 필요한걸 그때그때 구입한다. 냉장고가 없기 때문에 이틀에서 삼일 정도 먹을 양 정도만 구비하고 겨울엔 조금만 더 식단을 잘 짜서 일주일 정도를 장을 보지 않고 지낼 만큼 식재료를 사둔다.
문제는 정박지에 머무는 동안 마트를 가야만 할 때이다. 스페인에 오기 전 까지 우린 한 정박지에 오래 머무른 적이 없었다. 목적지는 없었지만 항상 어딘가를 향해 이동 했기에 아무리 마음에 드는 정박지도 이틀 이상을 머무르지 않았다. 그렇기에 식재료가 떨어질 일이 없었다.
그런데 스페인 어딘가의 해변가에 정박을 하고 나서 우린 그곳에서 이주일 가까이 지냈다. 스페인에는 밴을 털어가려는 도둑들이 많다는 소문들 때문이기도 했고 곧 크로아티아로 가서 민박집을 해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여행에 대한 의지를 상실하기도 했으며 결정적으로 그 해변이 너무 좋았다. 눈부신 햇빛에 반짝이는 바다와 선선한 바람 그리고 화창한 날씨는 하루하루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지낼 수 있게 해주었지만 4일 째 되는 날 밴 안에는 먹을게 전부 떨어져버렸다. 겨울이라 샤워는 삼사일에 한번을 했는데도 물은 거의 다 바닥이 났고 오수통과 화장실은 가득 찼다.
사람 사는 집도 보이지 않는 길을 따라 한참을 들어온 곳이었으니 걸어서 갈 수 있는 마트가 주위에 없다는건 뻔했고 인터넷 검색으로 찾아봐도 가까운 거리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게다가 공짜로 물을 받을 수 있는 곳은 차를 타고 약 20분은 족히 달려야 하는 곳에 있었다. 어차피 화장실도 비우고 물도 채워야 하니 그곳에 갔다 오는 길에 장도 보기로 했다.
그렇게 이날 처음으로 우리의 캠퍼밴이 너무 불편하다는걸 깨달았다. 비싼 캠핑카를 타본 적이 없어 어떻게 다른지는 모르지만 우리 밴은 이동할 때와 정박지에 머물러 있을 때가 다르기 때문이었다. 어설프게 만들어 놓은 선반은 문이 없고 컴퓨터나 잡동사니들은 벽에 고정되어 있지 않다. 게다가 부엌 살림들도 벽에 대충 매달려 있거나 조리대 위에 널브러져 있어서 이동을 하기 전에 이 모든 것들을 고정하거나 바닥에 내려놓아야 한다.
커다란 컴퓨터와 노트북들은 침대 위에 엎어 놓고 먹고 남은 음식들이 담긴 냄비는 바닥에 내려놓는다. 벽에 달아 둔 후라이팬이나 가재 도구들은 끈으로 고정해 흔들리지 않게 한다. 그 외에 이곳저곳에 놓여 있는 잡동사니들을 마저 바닥에 내려 놓으면 이동할 준비가 끝난다.
물론 이렇게 해놔도 이동 중에 이곳저곳에서 물건들이 떨어져 나와 바닥을 뒹군다. 수납장이 부족한대다가 있는 수납장 마저도 문이 없으니 이리저리 흔들리는 밴을 타고 가고 있으면 끊임없이 무언가 툭툭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심지어 저녁에 먹으려고 애지중지 아껴둔 남은 닭백숙을 가스렌지 위에 올려놓고는 깜빡 잊은 채 신나게 달리다 대차게 엎은 적도 있었다. 슈퍼가 전부 문을 닫은 저녁이었고 바닥에 엎어져 있는 닭백숙이 유일한 그날 저녁식사였으니 얼마나 허무했는지는 말로 설명할 수 조차 없다. 내 자신에게 그렇게 욕을 한 적은 아마 그 날이 처음이 아닐까 싶다.
어찌되었든 우리는 이동 중에 살림들이 떨어지지 않도록 꼼꼼하게 정리를 한 뒤에 물을 받을 수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캠핑 앱에서 본 그곳은 아마도 그 마을에서 운영하는 자그마한 캠핑카 주차장 같았다. 네비게이션이 안내해 주는 길을 따라가면 25분 안에 도착 할 수 있다고 하니 그리 멀지는 않은 듯 했지만 스마트폰이 안내해 주는 길에는 고속도로가 포함되어 있었다. 기름을 아끼기 위해 고속도로에서도 시속 70킬로로 달리는 우리는 보통 네비게이션에 나온 예정 도착시간 보다 1.5배의 시간이 더 걸린다.
유럽의 일반 국도의 제한 속도는 시속 80~90킬로미터이지만 우린 70킬로미터의 속도를 항상 유지했다. 편도 1차선의 유럽 국도는 폭도 좁고 구불구불해 추월하기가 쉽지 않아서 우리 밴 뒤로 차들이 줄지어 따라오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추월하면서 신경질적인 눈초리로 바라보거나 경적을 울리면서 지나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또 내리막길에서는 기어를 중립으로 놓은 채 활강하듯이 내려갔고 도심에서 출발과 정지가 많을 때에는 가속페달이 마치 깃털인것 마냥 아주 살포시 즈려 밟았다. 이 모든게 기름을 아끼기 위한 것이었다.
항상 네비게이션에 예정된 시간보다 한 두시간 늦게 도착했지만 연비는 어지간한 국산 승용차보다 좋았기 때문에 어딘가 급하게 가야할 일이 없는 우리는 언제나 느긋하게 주변 경치를 즐기며 이동했다. 그렇게 스페인의 한 작은 마을 캠핑카 주차장에도 40분 정도 걸려서 도착했다.
정말 자그마한 주차장 위에 유럽 각지에서 온 몇 대의 캠핑카가 정박해 있었고 한 켠에는 화장실과 오수를 비울 수 있는 무료시설이 되어 있었다. 차단봉 옆 비밀번호 입력기 밑에 적힌 전화번호로 전화를 하니 동네 방범경찰인 듯한 아저씨가 친절하게 비밀번호를 입력해 차단기를 열어줬다. 최대 이틀을 머물 수 있다는 듯한 말을 하고 방범경찰이 떠난 뒤 우린 시원하게 화장실과 오수통을 싹 비우고 최대한 해변가에서 오래 버티기 위해 신선한 물을 70리터 짜리 물탱크 뿐만 아니라 마시고 남은 생수통들까지도 가득 채웠다 .
먹을 것을 잔뜩 산 뒤 원래 있던 해변가로 돌아올 때 즈음 날은 어두워져 있었다. 겨울이라 해가 짧은 탓도 있겠지만 오수통들을 일일이 꺼내 비우고 물도 채운 뒤에 마트까지 들렸다 오느라 시간이 더 오래 걸리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가뜩이나 시골이어서인지 길에 차가 많지 않았지만 저녁이 되니 도로를 다니는 차는 우리 밖에 없었다. 게다가 큰 고속도로의 나들목이나 횡단보도가 있지 않은 이상 가로등이 전혀 설치되어 있지 않은 유럽의 도로는 밤에 상향등을 켜지 않으면 정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달도 떠 있지 않은 밤이면 어두운 도로 위에 우리 차의 전조등 밖에 없다. 그런데 정박지에 도착할 때 즈음 오른쪽 사이드미러로 비치는 우리 밴의 후미등 불빛이 보이지 않았다. 브레이크를 밟아보아도 거울 속은 시커먼 어둠 뿐인걸 보니 아무래도 밴의 뒤쪽 전구등이 터진게 틀림 없었다.
조용한 해변으로 돌아온 다음 날 오른쪽 뒷편의 후미등의 전구를 점검해보기로 했다. 오래된 차이기 때문에 단순히 접속 불량일 수도 있고 정말로 전구가 터진거라면 어떤 종류의 전구를 사야하는지 알아야 새 것을 살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도 후미등을 분해하는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2006년 식의 우리 밴은 전자장비가 거의 없었기에 고장난 부위를 점검하거나 직접 분해 점검 및 조립을 하는게 복잡하지도, 그리고 어렵지도 않았지만 나사들이 녹이 슬어 분해를 시작하는 일 자체가 쉽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후미등을 분해해보니 전구의 필라멘트가 끊어졌을 뿐만 아니라 규격에 맞지 않는 전구들이 억지로 소켓에 끼워져 있었다. 이번에도 전 주인이 대충 교체를 한 듯 했다.
밴을 맨 처음 구입할 때에는 싼 가격 뿐만 아니라 적당하게 큰 크기에 흥분해서 대충보고 구입을 했었는데 밴을 끌고 주차장으로 돌아오자마자 문제점들이 하나 둘씩 보이기 시작했었다. 구입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비가 와서 와이퍼를 작동 시키니 규격에 맞지 않는걸 대충 껴놓아서 금새 빠져버렸다. 또 며칠 뒤에는 배터리를 충전시켜주는 얼터네이터가 고장이나서 교체하려고 보니 규격에 맞지 않은 부품이 끼워져 있어 찾는데 애를 먹었다. 왼쪽 전조등과 왼쪽 앞바퀴 충격흡수장치 고장은 굳이 말을 안해도 글을 쭉 읽어 온 독자라면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그동안의 고장난 부위들을 종합해본 결과, 우리 밴은 왼쪽 부위에 큰 충격을 받는 사고를 당했던 듯 했고 전 주인이 아주 적은 돈을 들여 대충 수리를 하면서 규격에 맞지 않는 부품을 억지로 가져다 붙여놓은 것이 틀림없었다. 다행히도 반대쪽 후미등에는 규격에 맞는 전구가 끼워져 있었던 덕분에 어떤 전구를 사야하는지 알게되었고 그렇게 수리를 일단 마무리 했다.
그리고 우리만의 해변에서 일주일을 더 보낸 뒤 혜아의 지인들을 만나기 위해 다시 바르셀로나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