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차피 밴라이프를 하며 여유로움을 즐겨본 적이 없으니 아쉬울 것도 없었다. 분명 우리는 바쁘고 정신없는 일상에서 벗어나 하고 싶은 일을 하며 밴에서 살고 있는데 항상 바빴고 정신없었으며 고달팠다. 그러니 여유롭게 크로아티아를 즐기려던 계획이 틀어졌어도 언제나 그렇듯 우린 괜찮았다. 오히려 한치의 고민도 없이 바로 삼일 뒤에 스플리트에 도착을 하기로 계획을 바꾸고 민박집에 연락을 해 인터뷰 날짜를 앞당겼다. 그리고 9000원으로 삼일 동안 먹을 수 있게 장을 본 뒤에 바로 민박집이 있는 도시로 향했다.
우리는 스플리트가 있는 남쪽으로 고속도로가 아닌 국도를 따라 내려갔는데 왼쪽은 높은 돌산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오른쪽으로는 바닥이 훤히 보이는 아주 맑은 아드리아 해가 펼쳐져 있었다. 에어컨이 없어 역시나 더운 날씨에 이동을 하다가 도저히 견딜 수가 없을 때에는 길 한켠에 차를 세워놓고 수영복도 입지 않고 벌거벗은 채 바닷 속으로 뛰어들었다. 길에는 지나다니는 차도 없었고 끝없이 펼쳐진 해안에는 사람이 단 한명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밤에는 바다 바로 옆으로 뻗어 있는 돌산 때문인지 강풍이 엄청나게 몰아쳤다. 이러다가 밴이 넘어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세찬 바람 덕분에 조금은 걱정스럽지만 덥지 않은 선선한 밤을 보낼 수 있었다.
그대로 스플리트까지 가고 싶었으나 화장실을 당장 비워야만 했고 작은 민박집의 인터뷰라고 해도 대충 씻고 면접을 봐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스플리트와 그리 멀지 않은 도시인 자다르(Zadar)에서 서비스 존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하나쯤은 있을 법한 무료 서비스 존을 캠핑 앱에서 찾을 수가 없었다. 아니 크로아티아에 아예 없는 듯 했다. 크로아티아는 서유럽 국가의 사람들에게 꽤나 유명한 여행지라고 알고 있었는데 캠핑카를 위한 서비스 존이 없다는 사실에 놀랐다. 무료로 캠핑을 할 수 있는 정박지를 찾는 것도 쉽지 않았고 어딘가에 밴을 하루 이틀 정도 세워두면 동네 주민이 찾아와서 다짜고짜 아무런 설명도 없이 차를 옮기라고 했다.
나의 추측이지만 여행업 외는 다른 산업이 딱히 없는 크로아티아는 많은 국민들이 여름 한철 장사로 먹고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듯 했다. 때문에 와일드 캠핑이 불법인 크로아티아에서 우리처럼 캠핑카로 해변가에 무료로 정박하고 지내는걸 참지 못하는 듯 경찰이 아니라 주민들이 득달 같이 쫓아와 캠핑장으로 옮기라고 짜증을 내는게 아닐까 싶었다. 그러한 이곳에 무료 서비스 존이 있을리 만무했다.
우린 결국 돈이 없으니 물을 받아 샤워를 하는 건 포기하고 일단 화장실이라도 어떻게든 공짜로 비워보기 위해 자다르 외곽에 문을 연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캠핑장을 찾아갔다. 주변에 딱히 아름다운 풍경이라고는 볼 수 없는 마치 사막처럼 황량한 땅 위에 있는 꽤나 널찍하고 캠핑장은 시즌이 한창인 9월인데도 텅 비어 있었다. 시설들이 꽤나 새것인 듯 보여 아직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인가 싶었다. 관리하는 직원이나 주인 같은 사람도 나타나지 않길래 일단 우린 차를 캠핑장 구석에 세워 놓고 공용 화장실에 캠핑용 화장실을 비웠다. 누군가 나타날나면 돈을 낼 생각으로 최대한 천천히 화장실을 비우는 동안에도 관계자는커녕 투숙객 한 명 보이지 않자 우린 에라 모르겠다며 빈 물탱크를 채우기 시작했다. 곧 스플리트에 도착하니 샤워를 할 수 있을 만큼의 물만 채울 생각이었지만 우리도 모르게 샤워도 끝내고 물통도 가득 채워 버렸다. 보통은 2유로에서 5유로 정도의 돈을 내야 하지만 가끔은 우리에게도 이런 행운이 있나보다. 결국 우린 아무도 만나지 못하고 캠핑장을 빠져나와 자다르 시내의 바닷가 바로 앞 주차장에 정박했다. 민박집 면접까지는 이틀이 남아있었고 스플리트 까지는 약 한 시간 거리 밖에 안 떨어져 있었으며 곧 밴라이프도 잠시 멈추고 될 테니 서두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바닷가 앞 주차장에서 문을 활짝 열어놓은 채 심심하면 내려가서 수영을 하고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지나가는 여행객들과 눈이 마주치면 인사를 했다. 밴라이프 초반만 해도 주위 눈치 보느라 바빴는데 이제는 우리도 제법 뻔뻔해진 듯했다.
다음 날 느즈막히 자다르를 출발해 스플리트에는 해가 지고나서 도착했다. 스플리트는 자다르와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높은 아파트들이 우뚝 솟아 있었고 늦은 밤인데도 도심은 여행객들로 가득 차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클럽 의 노랫소리가 쿵짝쿵짝 들려 왔으며 술에 취한 클러버들이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도로를 이리저리 건너다니고 있었다. 이곳이 바로 휴향지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분위기를 즐기고 싶은 생각에 엉덩이가 들썩거렸지만 내일 민박집에 인터뷰를 가야하고 당장 민박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정박지를 찾아야 했으니 참기로 했다.
분명 자다르 보다 도시는 훨씬 커보였는데 도로는 별반 다르지 않게 좁고 주차할 곳은 더욱더 보이질 않았다. 게다가 캠핑 앱에 무료 정박지라고 나온 곳을 가면 가정집 대문 앞 길가의 급한 경사지이거나 클럽 입구 주차장이었다. 어쩔 수 없이 몇 바퀴를 돌다가 민박집에서 약간 떨어진 곳의 종합병원 주차장에 정박하고 조용히 밤을 보냈다. 이런 곳에서 정박할 때에는 절대 밴 주위를 어슬렁 거리거나 창문 블라인드를 열어 놓지 않는다. 우리가 여기서 자고 있다는 티를 내면 도난이나 단속의 위험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밖에서 보면 누가 봐도 캠퍼밴이었지만 되도록 티를 내지 않아야 도심 속 정박지에서 평화롭게 지낼 수 있었다.
무사히 하룻밤을 보내고 난 뒤 한낮의 정박지 주위는 여행지라기보다는 일반적인 주거지 같았다. 정박을 한 주차장은 차들로 가득 차 있었고 건너편 길가는 사람들도 북적거렸다. 우린 밴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고 조용히 내부를 정리한 뒤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민박집은 바로 바닷가 앞에 있었다. 위치도 좋아 보였고 주변엔 모래사장과 레스토랑 그리고 클럽 등등 없는 게 없어서 일하면서 여유롭게 수영도 즐기고 여가생활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런 일은 스플리트에서 지내는 3개월 동안 거의 없었지만 어쨌든 휴양지에서 사는 기분 하나는 제대로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일반 가정집들이 있는 건물의 한 층을 개조해 놓은 민박집 앞에 5분 전 도착해 정확한 시간에 연락을 했다. 직원과 연락이 잘안되었지만 건물의 현관 앞에 다행히도 민박집 초인종이 자그마하게 붙어 있었다.
왜 면접을 보자고 한 건지는 자리에 앉아 얘기를 나눈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방 알 수 있었다. 한 명만 뽑겠다는 거였다. 갑자기 일하던 사람이 그만두게 되었고 때마침 우리가 연락을 지원을 한 거였는데 한 명만 뽑는다고 하면 오지 않을까 봐 일단 면접을 보자고 한 것 같았다. 그래도 우리가 커플이란 걸 처음부터 알았다면 우리가 이곳에 오기 전에 말을 해주거나 아예 한 명만 뽑을 예정이니 안 되겠다고 했주었다면 좋았을 것을. 우린 오늘 길에 이런 문제로로 얘기를 나누다가 싸우기까지 했기 때문에 더 억울한 기분이었다.
민박집은 방이 네 개였고 스물 두명 정도가 잘 수 있는 꽤나 큰 곳이었다. 우리가 일했던 런던의 민박집보다 규모가 컸으니 경험에 비추어 봤을 때 혼자서 일 한다는 건 절대 쉽지 않을게 확실했지만 돈이 아쉬운 건 우리였고 여기까지 와서 한 명만 일하는 거면 아예 안 하겠다고 돌아설 수도 없는 노릇이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자 스태프가 필요하다고 해서 일은 혜아가 하기로 했다.
며칠 뒤 인수인계가 끝나고 직원들이 떠난 크로아티아의 민박집에서 남은 여름을 시작했다
재미있어 단숨에 읽게 되네요. 황당했겠어요.
매번 저의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정말정말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