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을 구입하려고 마음 먹은 순간부터 단 한순간도 쉬운 적이 없었다. 난관을 넘으면 또다른 난관이 있었고 문제를 해결하면 새로운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풀었다 싶으면 다시 꼬였고 꼬인건 한번 더 꼬였다. 그래도 문제를 하나씩 해결해 나가는 재미가 나름 있었기 때문에 사실 힘들다거나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30도를 훌쩍 넘어가는 대낮에 펄펄 끓는 아스팔트 위 모기가 들끓는 고속도로 휴게소 한켠에서 널브러져 있는 물통을 보고 있자니 오만가지 생각이 다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가 남의 나라에서 이러고 있나 자괴감도 들었다. 밴라이프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집에 가고 싶었다. 밴의 수도설비 모든 부분이 물통과 딱 맞게 만들어 논 터라 똑같은 물통을 구하지 않는 이상 다른걸로 교체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래도 정신만 바짝 차리면 호랑이한테 물려가도 살 수 있다고 하지 않았나. 며칠 전 부터 고정볼트에서 빠져나와 흔들거렸던 물통을 미리 고정 시켜놓지 않은 내 자신에 대한 분노를 가까스로 억누르며 널브러진 물통을 일으켜 세우고 보니 다행히도 물통은 깨지거나 금이 간 곳이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물이 거의 가득 차있던 엄청난 무게의 물통이 떨어지면서 물통에 연결되어 있던 필터도 같이 떨어져나왔다. 그냥 떨어져 나오면 좋았으련만 필터와 호스를 연결하는 부분이 깨지면서 떨어져버리는 바람에 복구가 불가능해보였다. 필터는 혹시나 물통에 있을지 모르는 오물이 펌프로 빨려들어가 펌프를 손상시키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지만 없어도 사는데 지장이 없는 부품이었다.
정신을 추스리고 물이 다 빠져 가벼워진 물통을 제자리로 가져다 놓고 깨진 부품을 다 떼어낸 뒤 대충 수리를 마쳤다. 주변에 모기가 훨씬 더 많았기 때문에 얼른 자리를 떠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의 모기는 어찌나 독한지 한번 물리면 엄청난 크기로 퉁퉁 부어 올랐고,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가려웠다. 씻다 말고 나온 혜아랑 같이 얼른 물을 다시 채워넣고 도망치듯 피렌체를 향해 출발했다.
해가 지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즈음 피렌체에 도착했다. 역시나 도심 안쪽으로는 허가증 없이 들어갈 수 없었기에 캠핑앱을 통해 찾아낸 어느 운동장의 큰 주차장 한 구석에 주차했다. 거의 한끼도 먹지 못하고 이동을 한 우리는 주차를 하자마자 근처 아무 피자집을 찾아 허겁지겁 배를 채웠다. 유명하거나 맛집도 아닌 그냥 동네의 조그마한 피자 가게였지만 그 시간에 문을 열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오랜만의 외식이었기 때문인지 커다란 피자와 얼음이 동동 띄워진 콜라는 이탈리아의 지독한 더위와 모기떼에 지친 우리의 몸 속 구석구석을 시원하게 가득 채워주는 것 같았다.
눈물나게 맛있는 저녁을 정신없이 먹고나니 주차장에 세워둔 밴이 걱정되어 우린 주위를 둘러볼 사이도 없이 바로 돌아왔다. 밤 10시에 가까운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주차장의 분위기는 꽤나 어수선했다. 어딘가에서 야외공연을 하는 듯 시끄러웠고 넓은 주차장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어린 애들은 시끄러운 오토바이를 타고 주차장을 미친 듯이 돌아다녔고, 잔뜩 개조가 된 차들이 주차된 곳 주위로 삼삼오오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괜히 주차장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의심스러워 보였고 왠지 우리 밴을 흘끔흘끔 쳐다보는 것 처럼 느껴졌다. 하루 종일 더운 날씨에 운전을 한 탓에 더 이상 움직이고 싶진 않았지만 혜아가 너무나 불안감을 느낀데다가 나도 그리 썩 기분이 좋지 않았기에 결국 우린 주차장을 떠났다.
새로운 정박지도 역시나 주차장이었지만 피렌체 중심가에서 약 20분 정도 떨어진 산 중턱의 어느 작고 예쁜 마을의 뒷편에 있었다. 조용한고 한산한 주차장에서 고요한 밤을 보내고 낮이 되자 어김없이 햇살이 밴 위로 쏟아져 내렸다. 산 위에 있어서인지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긴 했지만 어차피 더위를 피할 수 없을테니 피렌체 시내를 구경하러 나가기로 했다. 낮에도 주차장은 한산했기에 한결 홀가분한 마음으로 밴을 정박해둔 채 텅 빈 버스를 타고 피렌체로 내려갔다.
하지만 버스는 피렌체에 가까워질수록 사람이 가득 찼고 내릴 때 즈음 거리의 엄청난 인파에 깜짝 놀랐다. 어딜 가나 사람들로 넘쳐났고 우린 여기저기로 쓸려다녔다. 어딜가나 줄을 서야 했고 어딜 들어가든 입장료를 내야만 했다. 엄청난 기대를 하고 온 혜아도 피렌체 시내를 걷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 금방 지쳐가기 시작했고 영화의 배경이 어딘지 알 수도 없을 정도로 피렌체 시내는 사람들로 가득차 있었는데 심지어 비까지 엄청나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천둥번개를 동반한 비가 오다가다를 반복하면서 날이 어두워지자 우린 그냥 밴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역시 우린 유명 여행지랑은 잘 안맞는 것 같았다.
다시 피렌체 시내를 가로질러 버스를 타고 구불구불한 산길을 올라와 마을 뒷편 주차장에 세워둔 밴의 뒷문을 열자마자 흠뻑 젖어 있는 침대 메트리스를 보고 깜짝 놀랐다. 우리가 천정 창문을 열어놓고 나갔던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 비가 올 때 밴 안으로 들어왔던 것인지 별의 별 생각이 다 들었지만 모든 창문들은 안쪽에서 잘 잠겨 있었다. 도대체 왜 침대가 젖어 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크게 신경쓰진 않기로 했다. 이미 전날 부서질뻔한 물통 때문에 더 이상 다른 것에 스트레스를 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밴으로 돌아오자 거짓말처럼 비구름이 물러가고 해가 났지만 우린 밴을 정리하고 그대로 피렌체를 떠났다. 로마도 가지 않기로 했다. 피렌체에 사람이 이정도면 로마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겠다는 확실이 들었고, 피렌체로 오면서 수많은 산을 넘어 오느라 기름값을 예상보다 많이 써버리는 바람에 만일을 대비해 크로아티아 쪽으로 가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피렌체를 출발해 베니스를 지나 늦은 밤이 되어서야 슬로베니아의 블레드 호수 근처에 도착했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있었고 너무 어두워서인지 블레드 호수 근처에는 적당한 정박지를 찾을 수 없었다. 근처를 몇 바퀴 돈 후에야 좁다란 비포장 도로 한켠의 나무 숲 밑에 숨어들 수 있었다. 이곳에 있으면 아무도 우릴 방해하지 않을거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