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브레이크를 밟을 때만 소리가 났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브레이크에서 쇠 갈리는 소리가 커지고 나중에는 달리기만 해도 쇳소리가 났다. 우리는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밴라이프는 너무나 흥미진진했고 너무나 두려웠고 너무나 재미있었기 때문에 그깟 쇳소리에 신경이 크게 쓰이지 않았다. 어쨌든 당장은 차에 아무런 문제가 없으니까…
게다가 우린 바퀴를 수리할 수 있는 돈이 없었다. 돈이 얼마나 필요할지도 몰랐지만 단 돈 몇 만원으로는 어림도 없을거라는걸 닳아가고 있는 디스크를 보면 예상할 수 있었다.
어쨌든 쇳소리를 못들은척 하며 우린 프랑스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가기로 했던 곳으로 달렸다.
영국 유학생활 중 우연히 세계2차대전의 실제 이야기를 그린 미국 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스’ DVD를 구입하면서 세계 2차 대전에 역사에 빠져들었고, 전쟁이 일어났던 실제 장소에 가보고 싶었다. 마침 밴을 만들면서 혜아 또한 드라마의 마니아가 되었고 자연스럽게 우리의 밴라이프 첫 목적지는 1944년 6월 6일 오버로드 작전이 벌어진 일명 ‘노르망디’ 해변이였다. 그리고 마침 우리가 노르망디에 도착했을 땐 6월 4일이였다.
해변은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서 상상했던 모습과는 많이 달랐다. 상당히 평평하고 드넓었으며 나치 군인들이 상륙하던 연합군을 향해 기관포를 쏘아대던 곳은 없어져 있었다. 조용하고 소박한 시골 해변마을이라고 하는게 더 나을 정도로 아주 작고 아무 것도 없는 곳이었다. 맨 처음으로 도착한 ‘유타(Utah)’ 해변은 미국군이 상륙을 한 곳 중 하나였고, 다른 곳에 비해 해변이 낮았고 상대적으로 나치군의 수비가 약해서 큰 저항 없이 상륙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해변을 지키던 나치의 초소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히틀러가 세웠던 아틀란틱 월(Atlantic Wall)의 흔적을 따라서 ‘유타’ 해변에서 동쪽으로 조금만 더 가면 가장 유명한, ‘라이언 일병 구하기’ 등의 영화를 통해서도 잘 알련진 ‘오마하’ 해변이 나온다. ‘유타’ 해변에서는 운 좋게도 나치 벙커 옆에서 조용한 밤을 보냈지만 ‘오마하’ 해변은 훨씬 더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오기 때문인지 해변 주위는 레스토랑과 호텔들로 가득했고 정박할 곳은 없어보였다. 우리는 이미 프랑스로 넘어오기 전 부터 핸드폰 데이터가 다 떨어져 있어서 와이파이 신호가 있는 레스토랑 근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정박지를 천천히 찾아보기로 했다. 이곳에 도착했을 때는 6월 6일이였고 그날 밤 상륙작전을 기념하는 폭죽쇼가 열릴 예정이었다. 우린 어차피 어디로 가서 자야할지도 모르니 그냥 이곳에서 하루 머물면서 폭죽쇼도 보고 밥도 먹고 공짜 인터넷을 쓰면서 하루를 보내기로 했다. 디데이에 미군들이 나치와 역사적인 사투를 벌였던 해변에서의 하룻밤이라니…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폭죽쇼는 소박했지만 감동적이였다. 왠지모르게 경건해지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그날의 총성과 폭발음은 이보다 더 컸을테고 그들의 희생 덕분에 오늘 우리가 여기서 이렇게 캠핑을 하면 폭죽쇼를 본다는 생각 때문인 듯 했다. 시간은 행복하게만 흘러가는 듯 했지만 마주하고 싶지 않은 현실이 하나 있었다. 화장실과 오수통이 점점 차오르고 있었고 마실 물도 거의 다 떨어져가고 있었던 것이다. 반드시 처리해야하는 일이었지만 왠지모르게 모른척 하고 싶었다. 그냥 최대한 모른척, 아무 일도 없는 척 하고 싶었다. 상상 속의 밴라이프는 항상 행복하고 즐거운 일만 일어났고 걱정할 일이라곤 눈꼽만큼도 없었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건 혜아가 어찌어찌 알아낸 캠핑앱이었다. 앱에는 어디서 캠핑카에게 필요한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지, 또는 어디서 공짜로 잘 수 있는 등을 지도에 표시해주고 있었다. 게다가 이곳을 이용한 적이 있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리뷰까지 남겨 놓았으니 꽤나 유용했지만, 이 앱에 익숙해지는 일 또한 스트레스였다. 맞지 않는 정보도 있었고, 운영을 하지 않는 곳도 있었으며 21세기에 만든 앱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조악해서 다루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몇 군데를 허탕치고 나서야 시골 지방 국도의 어느 주유소에서 운영하는 서비스 존에서 흘러 넘치기 직전이었던 부엌 오수와 샤워 오수 그리고 화장실을 비워내고 새로운 물까지 받았다. 1유로를 주고 제한된 시간 내에 일을 처리하는 동안 둘다 허둥지둥 정신이 반쯤 나간 채로 움직였고 다 끝나고 나서는 우린 다퉜다. 다툰 이유는 기억 속에서 희미하고 만렙이(?) 쌓인 지금 생각해보면 웃음 밖에 안나지만 그 당시에 마주했던 현실은 다 때려치고 싶은 그것이었다.
우린 이후로 처음으로 마주하는 환경과 여전히 익숙하지 않은 밴라이프 그리고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의 다툼을 거치며 2차 세계대전의 흔적을 찾아 프랑스 북부 몇 군데를 더 다녔다. 행복하고 흥미진진한 시간의 연속이였지만 우리의 지갑은 점점 얇아지고 있었다. 디지털 노마드의 삶을 살자며 유튜브에 찍어 올린 영상은 일주일이 넘도록 10명도 채 안봤으며, 하필 그 즈음 유튜브의 정책이 바뀌어서 엄청난 수의 구독자와 불가능에 가까워 보이는 시청시간을 채우지 않으면 돈을 벌 수도 없게 되어버렸다. 10만원도 채 안 남은 지갑을 움켜쥐고 쇠 갈리는 소리가 나는 밴을 타고 우리는 파리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