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하루를 거듭하며 우린 밴라이프에 익숙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왠지모를 자신감 마저 차오르는 기분이였다. 날이 지날 수록 우리의 캠핑 장소는 과감해졌고 밴 안에서 보내는 저녁이 너무나도 편안하게 느껴졌다. 이제 우리는 완벽한 밴라이퍼가 된 것 같았다. 그렇게 우리는 거침없이 Lake District를 향해 올라갔다.
가는 길목에는 혜아와 내가 좋아했던 Peak District 국립공원이 있었다. 4월의 Peak는 아름다웠고 산과 골짜기로 이어지는 드넓은 초원들은 우리의 시선을 끊임없이 끌어당겼다. 사실 말이 국립공원이지 산과 계곡 그리고 초원이 펼져진 곳에서 사람들이 집을 짓고 삶을 살아가고 있는 평범한 곳이었다. 펍에서는 삼삼오오 사람들이 모여 시시콜콜한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며 에일을 마시고 있었고, 자신의 농장에서 기른 닭의 계란과 야채들을 길가에서 팔고 있는 아주 평범한 시골 동네.
밴라이프의 가장 좋은 점들 중에 하나는 언제든지 이런 아름다운 들판이나 호기심 생기는 마을에 다다랐을 때 잠시 멈출 수 있다는 것이다. 어딘가를 서둘러 가야 할 필요도 없기에 우린 언제든지 멈추고 싶을 때 멈추고 그 곳에서 여유롭게 즐겼다. 들판에서는 신나게 뛰어 다녔으며, 강에서는 수영을 했고, 마을에서는 커피를 마시고 사람들과 짧게 얘기를 나누며 돌아다녔다. 그렇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신나게 뛰고 수영하고 사람들과 얘기를 나눠도 바로 옆에 우리의 집이 있었기 때문에 걱정이 없었다. 뛰어 다니느라 땀에 흠뻑 젖어도, 수영을 너무 오래 해서 으슬으슬 추워도, 수다를 떠느라 시간 가는 줄을 몰라 밤이 늦어도 우린 바로 집으로 들어가 씻을 수 있었고 몸을 따뜻하게 데울 수 있었으며 집에 가느라 야밤에 택시를 타지 않아도 됐다. 우리의 집은 런던에도 있었고 쉐필드에도 있었으며 피크에도 있었다.
런던을 떠난지 일주일 정도가 되어가던 무렵, 이렇게 완벽해 보이는 밴라이프를 살고 있던 우리에게 현실을 적나라하게 깨닫게 해준 일이 있었다.
우리 밴 안에는 화장실이 있다. 일반 가정에 있는 세라믹으로 된, 물이 콸콸 쏟아져 나오는 변기와는 다른 아주 소량의 물을 이용해 사용하는 캠핑용 변기가 샤워실 안에 들어가 있다. 가정용 변기는 용변을 본 후 물을 내리면 집에서 아주 멀리 있는 오수처리장으로 가지만 우리의 변기는 변기 안에 그대로 쌓인다. 물론 특수한 용액을 변기 안에 집어 넣었기 때문에 냄새는 매우 덜하지만 어쨋든 어딘가로 가지 않고 그대로 변기 안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정도 변기가 차오르면 비워줘야 하고 비워야 할 시기를 알려주는 게이지가 있다. 게이지는 맨 처음 초록색이였다가 사용할 수록 점점 빨간색이 게이지 밑에서 부터 차오른다. 빨간색이 다 차오르면 비워줘야 한다는 뜻이다.
캠핑용 변기를 처음 사용해 본 우리는 여유롭게, 서두르지 않고 빨간색이 완전히 다 차오르면 비울 생각이였다. 사실 변기를 사용할 생각만 했지 그 변기를 어디서 어떻게 비울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을 해두지 않았기 때문에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고 하는게 맞을 것 같다. 하지만 변기의 용량은 그리 크지 않았고, 아직은 여유가 조금 있다고 마음대로 믿고 이름 모를 숲 속 한 켠에 밴을 세워둔 채 화장실을 썼다가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변기의 모든 틈이란 틈에서 오수가 쏟아져 나왔다. 생전 맡아본 적 없는, 아니 뜨거운 8월의 한강 고수부지의 이동식 화장실에서나 맡아봤을 법한 냄새가 밴 안에 가득 차기 시작했다.
변기는 샤워실 안에 있었기 때문에 다행히도 밴 전체에 흘러 넘치진 않았지만 이미 정신을 제대로 차릴 수 없을 정도로 우리는 혼란스러웠다. Peak District를 떠나 Lake District로 가고 있었던 우리는 차를 다시 Peak 쪽으로 돌렸다. 거기에서 들렸던 조그마한 공중화장실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창문을 활짝 열고 내달렸지만 냄새는 안에서 소용돌이를 쳤고 어의없는 우리의 모습에 서로 웃음만 났다. 상황은 끔찍했지만 재미있었다.
그렇게 공중화장실 옆 주차장에 도착했다. 공중화장실까지는 거리가 제법 멀었고 하이킹을 시작하는 장소였던지라 사람들이 꽤나 있었는데 화장실은 그리 크지 않았다. 아니, 변기 하나 있는 작은 화장실이였다. 변기는 오수통이 분리가 되기 때문에 일단 그것을 들고 아주 태연하게 화장실로 가기로 했다. 꽉 찬 오수통은 태연하게 들고 가기에는 정말 너무 무거웠다. 끙끙거리지 않는게 불가능 할 정도로 무거웠다.
사람들의 시선을 무시한 채 화장실에 들어가는데 성공했지만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변기를 화장실 변기에 쏟아 부을 때 냄새는 상상을 초월했다. 정신적인 충격을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이 세상의 냄새가 아닌 것 같았다. 또 어찌나 끝도 없이 쏟아져 나오던지…
그 이후로 세번 째 변기를 비울 때 즈음에 모든 것에 익숙해졌다. 캠핑용 변기를 비울 수 있도록 마련된 곳이라면 비우고 헹구는 것은 일도 아니였으며, 그렇지 않은 곳, 예를 들어 공중화장실이나 고속도록 휴게소의 화장실에서 변기를 비우더라도 사람들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았으며 냄새는 더 이상 느껴지지도 않았다.
마주하지 않으면 모른다
사실 우리가 준비를 부족하게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차에 넣었고 필요없는 것들은 과감히 포기했다. 전에도 언급했듯이 우린 모든게 완벽하다고 생각했고 준비는 철저했다고 자신했다. 하지만 밴라이프를 시작하고 나서 현실은 달랐다. 아니, 밴을 개조할 때 부터 달랐다. 캠퍼밴을 개조한 사람들의 여러 영상들과 글을 참고하며 충분히 필요한 지식을 얻었다고 생각했지만, 실제 우리의 밴은 그 영상들에 나오는 사람들과 항상 어딘가 조금씩 달랐고 영상들을 통해 얻은 지식들은 종종 무용지물이 되었다. 직접 문제를 마주하고 부딪혀서 해결을 해야만 했다.
엄청나게 커 보였던 물탱크도 삼사일 만에 동이 났고 넉넉해 보였던 변기도 일주일 만에 차올랐다. 그 어떤 동영상이나 블로그에서도 물이 삼사일 만에 떨어질 수 있으니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물을 어디에서 받아야 할지 알려주지 않았으며, 변기는 시도때도 없이 넘치려고 하니 얼마나 자주 어디서 어떻게 비워야 하는지 말해주지 않았다.
현실은 마주해야만 알 수 있었고 부딪혀야만 해결할 수 있었다. 만약에 우리가 밴라이프를 시작하기도 전에 운이 좋게도 이러한 여러가지 상황들을 예측했다고 치자. 과연 우리는 해결 방법을 찾을 수 있었을까? 아니 우리가 그 해결방법이 완벽하다고 자신할 수 있었을까?
이세상의 냄새가 아닌거 같았다 에서 빵터졌습니다ㅎㅎ
정말 그 냄새는 잊을 수가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