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은 이베이에서 본 그대로였다. 많이 낡지는 않았고 기름이 새는 곳은 보이지 않았으며 뒷바퀴의 위치가 조금 애매하긴 했지만 생활 공간으로 바뀔 짐칸은 180cm인 내가 일어서도 충분한 공간이 남을 정도의 높이였다. 전혀 문제 없는 밴이였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후에 꽤나 큰 문제들로 돌아왔다.
없는거 보단 낫다
루튼 공항 근처에 살고 있는 동유럽에서 온것으로 보이는 이민 노동자 차주는 950파운드에 밴을 이베이에 올려놓았지만 흥정과 사정 끝에 850파운드에 구입했다. 한 달 동안 번 돈을 거의 모두 쏟아부었다. 돈이 얼마 안남다 보니 녹을 제거할 그라인더나 내부에 붙어 있는 합판을 떼어낼 전동 드릴을 좋은 것으로 구입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역시나 이베이를 통해서 중고 무선 전동 공구를 구입했다. 고작 25파운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던 사무실 건물 뒷편 주차장에서 개조를 하기로 해서 전원을 꽂을 곳이 없기 때문에 무선 전동 공구를 산건데, 어찌나 완벽하게 중고였던지 배터리는 30분도 안되서 방전이 됐다. 공구를 사용하는 시간보다 충전하는 시간이 더 길어서 작업 시간은 엄청 더뎠다. 하지만 25파운드에 드릴, 그라인더, 손전등, 직소를 가졌으니 만족해야지. 없는거 보단 훨씬 나으니.
유럽의 화물밴은 짐칸 내부에 합판을 붙인다. 짐을 싣고 내릴 때 생기는 손상을 최소한으로 막기 위해서다. 이 낡고 더러워진 합판을 떼어내는데 3일은 족히 걸렸다. 합판을 고정하고 있는 나사못이 녹이 슬어서 3개 중 1개는 나사못 머리가 부서지거나 헛돌아서 빠가(?)가 나버렸기 때문이다. 없는 돈을 쥐어짜서 헛도는 나사를 뽑는 공구를 샀지만 그 이후에도 나사 하나 뽑는데 1시간은 넘게 걸렸다. 결국 내 인내심은 바닥 합판의 나사를 뽑아내다가 끊어졌고 남은 합판을 손으로 모두 잡아 뜯어버렸다. 이 후의 작업들은 일사천리로 진행됐지만 밴 곳곳의 다른 녹슨 나사들은 나중에도 골칫거리가 됐다.
합판을 제거하고 난 밴의 내부는 예상보다 훨씬 상태가 좋았다. 누군가가 짐칸에서 오줌을 눈 것 같은 냄새가 났지만 녹이 많이 슬어있지도 않았고 찌그러진 곳도 없었다. 그라인더로 바닥과 벽면 그리고 천장까지 녹슨 부분을 갈아내고 프라이머를 뿌린 뒤에 메탈 페인트를 발라 다시 녹이 슬지 않도록 했다. 과연 녹이 다시 생기지 않을까?
사실 이 밴은 혼자 생활할 목적으로 만들기 시작했었다. 물론 여행을 다니면서 만나게 될 누군가를 태울 수도 있고 재워줄 수도 있기에 두 세 명이 지내도 큰 무리가 없게 만들 생각이였지만 기본적으로는 혼자만을 위한 공간이였다. 그래서 ‘대충 침대 만들어 넣고, 샤워실이 있으면 좋고 없으면 말고. 부엌만 제대로 만들어서 잘 먹고 다니면 된거지’라는 생각이였던 것이다. 그런데 내부 단열 작업이 끝나고 창문을 달기 위해 벽을 뚫을 때 즈음 혜아를 만났고, 천장에 클래딩을 붙일 때 즈음 밴라이프를 같이 하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밴은 내가 아니라 우리가 살기 위한 공간으로 만들어졌다.
침대는 더블로 들어가야 하고 샤워실과 화장실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혜아가 불편함 없이 여행하고 생활하기를 원했다. 혹시나 샤워실이 좁아서 불편하지 않을까, 혹시나 공간이 좁아서 답답해 하지 않을까, 걱정들이 앞섰다. 그러나 이런 걱정들이 무색하게 밴이 완성된 후 우리는 밴라이프에서 아무런 어려움도 그리고 불편함도 느끼지 못했다. 물이 없어서 3일 넘게 씻지 못해도 아무렇지 않게 이불 덮고 잘 잤고, 화장실을 비우지 못해 흘러 넘쳐도 짜증은 커녕 차 안에 가득 찬 냄새 때문에 웃음이 터졌다. 우리는 서로 깔끔 떨지도 않았고 둘 다 약간은 게을렀다.
수단일 뿐 목적이 아니다.
밴라이프가 우리와 잘 맞았던 탓도 있겠고 둘 다 역마살이 끼어 있어서도 그렇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밴라이프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인 것 같다. 캠퍼밴은 우리에겐 그저 수단일 뿐이었다. 난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사진 작업을 하고 싶었고 혜아는 살아보듯이 여행하며 글도 쓰고 싶어했다. 당연히 번쩍이는 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나지 않았고, 한국 청년들이 들어가지 못해 안달난 대기업을 다니며 수천만원의 돈을 모아놓은 것도 아니었기에 없는 돈으로 가장 저렴하게 먹고 자고 이동할 수단이 필요했고 그 수단이 바로 직접 만든 캠퍼밴이였다. 수단이였기에 우리의 목적을 이루게 해주는 고물 밴이 오히려 고마웠고 하루가 멀다하고 터지는 문제점들이 스트레스로 느껴지지 않았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밴에서 사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였다면 아마 이미 화장실에 똥물이 흘러 넘치고 씻고 마실 깨끗한 물을 구하기가 쉽지 않다는걸 깨달은 영국에서 떠나기도 전에 그만 뒀을 것이다. 낭만적으로 보이지만 쉽지 않다.
앞으로 아직도 멈추지 않은 우리의 밴라이프를 이곳에 기록하고자 한다. 앞으로 우리와 같은 삶을 살고 싶은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비싸고 좋은 캠핑카가 아니어도, 수천만원의 돈이 통장에 꽂혀있지 않아도, 나 자신을 위한 삶을 살고 싶은 용기와 의지만 있다면 할 수 있다는걸 보여주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