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롭고 행복한 우리의 밴라이프는 점점 고질적인 돈 문제에 의해 잠식되고 있었다. 자유롭지만 돈이 없어서 자유롭지 못하고 행복했지만 돈이 없어서 행복하지 못했다. 맛있는 음식이 많은 프랑스에서 지내도 맛있는 음식은 단 한번도 사먹지 못했고 박물관 입장권이 아까워서 들어가지 못했으며 아름다운 스위스에서는 얼음동굴로 올라가는 기차도 우린 산을 오르는게 싫다며 억지로 괜찮은 척을 했다. 괜찮았지만 괜찮지 않았고 행복했지만 행복하지 않은 이상한 기분이었다. 우리는 반드시 이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다.
그래서 이틀 정도 샤모니를 둘러보고 나서 며칠 동안 우린 밴 안에서 지내며 돈을 벌 방법을 궁리했다. 배운게 도둑질이라고 가장 잘 할 수 있는 사진 찍는 스냅촬영으로 돈을 벌어볼까 했지만 아무런 포트폴리오가 없는 우리에게 사진을 맡기려는 사람은 없었다. 홈페이지 일은 뚝 끊겼고 적은 돈이나마 벌었던 혜아의 신문사 기고도 끝나버렸다.
정말 이제는 방법이 없구나 싶을 때 크로아티아의 한인 민박집에서 연락이 왔다. 파리에서 스타벅스를 전전할 때 온라인에서 구인광고를 보고 그냥 한 번 해보자는 마음으로 지원을 해둔 곳이었는데 면접을 보러 오라는 것이었다. 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에 흥분이 되기 시작했다. 게다가 크로아티아는 쉥갠 조약국가가 아니라서 우린 아무런 제약없이 무비자로 3개월을 일할 수 있었기에 꽤나 많은 돈을 모을 수 있을것 같았다. 벌써 모든 문제가 해결된 듯한 느낌이었다. 목적지 없이 다니던 우리에게 가야할 곳이 생기니 왠지 의욕마저 샘 솟는 기분이었다.
꺼림직한 부분은 조금 있었다. 일을 하라는 것도 아니고 면접을 보자면서 크로아티아까지 오라는게 영 찝찝했다. 부산에서 서울로 면접을 보러가는 것도 아니고 수천 킬로미터를 가서 보는 면접이니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해 보였지만 몇 명을 뽑는지 돈은 얼마나 주는지 그리고 크로아티아 어디에서 일을 하는지 등등 아무것도 알려주질 않았다. 유럽 여러나라에 지점을 두고 있는 민박집이어서 체계적인 회사일거라고 생각했지만 우리에게 연락을 준 직원은 전혀 그렇지 못한 것 같았다. 하지만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생겼으니 그런건 일단 신경쓰지 않고 9월 2일에 크로아티아의 스플리트에 있는 민박집으로 면접을 보러 가기로 했다.
어느덧 8월 중순에 접어 들었고 알프스 산맥에 둘러싸인 한여름의 샤모니는 너무나 선선해서 떠나기 싫었지만 우리가 쉥갠 조약국 안에 머물 수 있는 기간도 보름 정도 밖에 남아있지 않아서 밴 내부를 정리하고 크로아티아를 향해 천천히 이동하기로 했다. 여전히 우리는 아주 최소한의 돈을 쓰면서 이동했지만 곧 크로아티아로 가서 돈을 번다는 생각에 스트레스는 없었다. 오히려 더 신이 나는 듯 했다.
샤모니를 벗어나니 바로 스위스였다. 국도를 통해 산을 오르락내리락 하며 지나가는 풍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여행하고 싶었던 나라 중에 하나였기에 눈앞에 펼쳐진 아름다운 풍경에 10분에 한번씩 차를 세워 사진을 찍느라 바빴지만 너무나 비싼 물가에 미리 겁을 먹은 우리는 정박하지 않고 쿨하게 하루만에 지나가기로 했다. 사실 피렌체를 배경으로 한 영화에 푹 빠져있던 혜아가 피렌체에 너무나 가보고 싶어했기 때문에 크로아티아에 가기 전 이탈리아에서 지내기로 했다.
이탈리아의 길은 여러가지 의미로 매우 험하다. 먼저 길의 포장상태가 정말 엉망진창이었는데 국도는 오래 달리면 바퀴가 부서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도로가 많이 깨져있고 구멍들도 많았으며 고속도로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고속도로는 도시들 사이를 잘 연결하고 있지만 통행료가 꽤나 비쌌다. 그래서 우린 역시나 국도만 이용했지만 고속도로로 1시간이면 갈 거리를 3~4시간이 더 걸릴 정도로 구불구불 돌아간다. 심지어 구불구불한 산길은 낭떠러지에도 가드레일이 없다.
이런 험난한 이탈리아의 국도를 뚫고 피렌체에 도착하기 전 늦은 밤 정박한 곳은 파마산 치즈의 고장인 ‘파르마’였다. 이탈리아에 오기 한참 전부터 이탈리아에서는 캠핑카만 노리는 도둑들이 많다는 얘기를 지겹도록 들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또 등록이 되지 않은 차는 도심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제도가 있기 때문에 파르마 시내에서 좀 떨어진 곳에 정박을 했다.
하지만 다음 날 파르마 시내를 구경하러 과감히 차를 정박지에 세워놓고 걸어갔지만 무슨 날이었는지 거의 모든 상점들의 문이 닫혀있었다. 오랜만에 기분 전환을 하고 싶었지만 분위기 때문에 기분은 더 우울해졌고 그냥 밴에서 샤워나 하기로 했다.
보통 샤워를 하기 전 물의 양이 얼마나 남았는지 확인을 하기 위해 뒷문을 열고 물통을 손으로 통통 두드려본다. 소리를 듣고 물의 양을 예측하는건데 이 날은 두들겨 볼 필요도 없어보였다. 물탱크와 호스를 연결하는 부분에서 물이 새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은 거의 다 빠져 나가 있었고 물이 얼마나 샌건지 물탱크를 받치고 있던 구조물이 물에 젖어 휘어져 있었다. 물탱크도 약간 주저 앉으면서 고정된 볼트에서 빠져 나온 채 흔들리고 있었다.
스위스를 벗어나면 더울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이탈리아의 더위는 정말 엄청났다. 더위 뿐만 아니라 모기도 엄청났다. 때문에 더워서 땀을 비오듯이 흘린 몸에 모기들까지 꼬이니 정말 정신을 잃을 것 같았다. 물이 새는 부분을 고치려면 물탱크에서 물을 모두 빼내야만 했는데 정신을 잃을 정도로 절박해지니 정말 순식간에 물탱크를 떼어내서 물을 모두 빼낸 뒤에 물이 새는 부분을 고친 뒤에 다시 차에 고정을 하고 물을 찾아 출발할 수 있었다. 고친 부분이 완전히 말라야 다시 물이 새지 않았지만 그걸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
물을 받을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곳은 고속도로의 어느 휴게소였다. 하지만 고속도로는 유료였기에 국도를 통해서 휴게소의 뒷편으로 가니 휴게소는 철책으로 막혀있었지만 직원들이 이용하는 듯한 출입구와 주차장이 있었다. 우린 출입구 바로 앞에 차를 세워 놓고 담을 넘어가며 물을 담기 시작했다. 너무 더웠기 때문에 시간을 아끼기 위해 혜아가 먼저 샤워를 하고 난 물을 퍼나르기 시작했다. 다 마시고 남은 7리터 짜리 생수통을 들고 휴게소 담을 넘어가 물을 채운 뒤 다시 넘어와 물통에 물을 채웠다. 수리한 곳에서는 더 이상 물이 새지 않는것 같았지만 물에 젖은 나무 때문에 물통은 여전히 흔들거리고 있었다. 그래도 문을 닫으면 물통이 고정이 되니 크게 신경쓰지는 않았다.
휴게소도 모기들이 득실거렸지만 조금만 참으면 샤워도 할 수 있고 곧 해가 질테니 괜찮아질거라고 애써 위로하며 물통을 3분의 2쯤 채웠을 때 휴게소에서 물을 뜨고 있는 나에게까지 들릴 정도로 무언가 떨어지는 큰 소리가 났다. 흔들리던 물통이 떨어져 나간 것이었다.
눈 앞에 보이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았다. 70리터 짜리 커다란 물통은 바닥에 널브러져 물이 줄줄 새어나오고 있었고 물탱크와 연결되어 있던 각종 연결 장치들은 엄청난 무게의 물탱크가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모두 부서져 떨어져나와 있었다. 처음으로 다 때려치우고 싶은 생각이 치밀어 올랐다.